(칼럼) 영어의 국어화
이게 무슨 소리냐 싶죠? 올해 수능 영어 24번 선지를 자세히 분석해보시면 제목의 의미를 명쾌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문제부터 보시죠
이 문제 의문사하신 분들 꽤 있을 것입니다. 지문 자체의 내용을 이해하는 건 쉬웠지만, 선지 판단에 애를 먹어서 틀린 분들이 꽤 됩니다. 메가스터디의 선지별 선택 기록을 보겠습니다.
대의파악 문제임에도 오답률이 3번째로 높고 46%나 됨을 알 수 있습니다. 1번과 4번, 그리고 5번 선지가 선택률이 10%가 넘고 그리고 4번 선지는 선택률이 20%나 됩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1번과 4번 선지입니다. 사실 5번 선지는 글의 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고른 선지일 확률이 높습니다. 반면에 1번과 4번은 글의 요지를 제대로 이해해도 선지 파악에 실패하면 충분히 고를 수 있는 선지입니다.
우선 1번 선지부터 보시죠. 1번 선지는 무엇 때문에 틀렸을까요? 바로 Humanity 때문입니다. 1번 선지의 of 앞부분은 맞는 말이지만 of 앞부분의 의미를 of 뒤의 Humanity가 한정시킴으로써, 1번 선지와 of의 앞부분은 완전히 다른 말이 되었음을 알 수 있죠. 따라서 1번 선지를 꼼꼼히 해석해보면, 윗글의 제목으로 적절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4번 선지입니다. 4번 선지는 무엇 때문에 틀렸을까요? 혹시 4번 선지에서 Touch와 Time의 자리를 바꾼 다음 뜻을 해석해볼까요? 4번 선지를 해석하면 '시간의 개념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촉각의 역할'이라는 뜻이고 자리를 바꾼 말의 뜻을 해석하면 '촉각의 개념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시간의 역할'이라는 뜻입니다. 둘의 위치만 바꾸었음에도 상당히 다른 뜻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둘 중 하나가 이 글의 제목이 된다면 어떤 것이 더 적절할까요? 당연히 '촉각의 개념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시간의 역할'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선택지에 후자가 들어갔다면 당연히 복수정답일 것입니다.
솔직히 분석하면서 출제진이 좀 쪼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나요? 단순히 한 두 단어가 잘못 들어감으로 인해서 유력한 정답 후보가 한순간에 오답으로 바뀌어버리니까요. 그런데 저는 수능이 끝나고 이 문제를 왜 많이 틀렸나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소름이 돋았습니다. 사실 1번과 4번 선지는 수능 국어에서 자주 활용하는 선지 기법인 A의 B 함정을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지문에서 A라고 했고, 문제에서 A가 적절 여부를 묻는다면 당연히 적절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지문에서 A라고 했는데, 문제에서 A의 B가 적절한 지의 여부를 묻는다면 이는 A의 적절 여부를 묻는 것하고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A의 B는 원래 상대적으로 큰 개념인 A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개념인 B로 한정시켜준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A와 뜻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국어 출제진은 교묘히 A는 적절하지만 A의 B는 적절하지 않은 경우에서 A의 B의 적절 여부를 판별하도록 합니다. 문제가 어려울 때는 많은 수험생이 틀리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요.
1번과 4번 선지를 다시 한 번 볼까요? 1번은 Humanity로 of 앞부분을 의미적으로 한정시킴으로써 적절하지 않은 선지를 만들었고, 4번은 선지를 분석해보면 The Role of X in Forming the Concept of Y에서 X에 Touch를 대입하고, Y에 Time을 대입함으로써, A의 B에서 B에 들어갈 부분을 서로 바꿨습니다. 특히 4번 선지의 오답률이 높은 이유는 이 글의 핵심 키워드인 Touch와 Time이 모두 쓰였기 때문이죠
저는 올해 쉬웠다는 영어에서도 방심하면 안되는 것을 꼽으라면 단언코 이 문제를 꼽을 것입니다. 이 문제의 의의는 앞으로 평가원이 언제든지 영어에서도 이러한 선지 기법을 자주 사용하겠다는 것을 암시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실 미국 로스쿨 입학시험 LSAT에서는 자주 쓰는 근본있는 출제기법입니다. 따라서 연계율 축소 및 직접연계 페지(?)로 기존보다 더 높은 독해 피지컬을 요구하는 앞으로의 수능 영어를 공부함에 있어서, 소홀히 공부하면 안될 것 같고 영어를 국어 비문학처럼 공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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